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당 합당 (문단 편집) == 합당 이후 내부 권력 구도 == 합당 이후 [[김영삼]]은 당권을 주도하기 위해 매우 격렬한 정치 행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. 3당 합당은 애초에 사상과 기반이 전혀 다른 세력들이 어쩌다 보니까 이해관계가 맞게 되어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. 민자당에서 [[김영삼]]의 민주계는 노태우의 민정계보다 세력이 뒤쳐져 있었고 김영삼이 당내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나가는 과정은 그동안 [[박정희]], [[전두환]]과 싸우면서 겪었던 격렬한 정치 투쟁을 이젠 같은 당 안에서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. 즉, 3당 합당으로 김영삼의 정치적 여로가 활짝 열리고 수월하게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3당 합당을 지나치게 도식화하여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. 그런 상황에서 김영삼은 합당 당시 [[의원내각제|내각제]] 개헌을 하기로 한 당초의 약속을 깼다. 내각제 합의 비밀 문서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언론에 유출되어 내각제에 반대하던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자 김영삼은 자신이 내각제를 하겠다고 합의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밝히면서 내각제를 할 수 없다고 표명했다. [[동상이몽|의원내각제가 목표였던 김종필과 달리 대통령이 목표였던 김영삼은 처음부터 내각제를 할 생각이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]] 김종필 본인도 YS를 그렇게 평가했다. 어쨌든 이런 상황 속에서 [[김영삼]]은 자신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밀지 않으면 탈당하겠다는 배수진까지 치면서 [[노태우]] 대통령을 압박했다. [[김영삼]]의 탈당 협박은 본인에게도 큰 모험이었는데 김영삼은 군사정권의 연장이라 해도 무리가 없는 [[노태우 정부]]와 손을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재야 진영에서 "배신자" 소리를 들으면서 정치적으로 꽤 큰 출혈을 입은 상태였다. 그런 상태에서 탈당한다고 한들 옛 동지였던 재야 세력에게서 예전만큼의 호응을 얻기란 매우 어려웠다. 그래서 이를 알고 있던 [[김영삼]]도 본인이 탈당해서 [[평화민주당]]으로 들어가 [[김대중]]을 지지하겠다는 식으로 당내 민정계를 압박했다. 만약 양김 연합이 성사된다면 군부세력 vs 민주세력 구도로 대선이 진행되는 데다 [[김대중]]에게 '영호남 통합 후보'라는 상징성까지 쥐어주게 되고 본인도 2인자로서 다음 대권을 바라볼 수 있을 테니 김영삼으로서도 해 볼 만했다. 마침 [[국군보안사령부|국군 보안사]]에서 '청명계획'을 세워서 야권 인사들을 사찰, 체포하는 작전을 세웠다는 [[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|폭로]]가 터지고 여기에 김영삼도 사찰 대상이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김영삼은 '''"여당 대표최고위원도 사찰하는 정권"'''이라며 노태우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였다. [[김영삼]]의 이런 행보에 [[박철언]] 등을 포함한 민정계는 강력히 반발했으며 일부 민정계 강경파는 차라리 분당하자고 주장했지만 10~20%대의 낮은 정권 지지율과 함께[* 당시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이미 1989년 말 들어서 5공 청문회의 여파로 지지율이 20%대로 떨어졌고 1991년과 1992년에는 정권 지지율이 10%대를 기록하고 있었다. 정당 지지율 역시 1990년부터 1991년 초에 이르기까진 민주자유당이 부동산 문제 등 높은 물가상승률로 인한 불만 증가와 함께 3당 지지층의 화학적 결합에 실패해서 제1야당인 평민당이나 제2야당인 꼬마민주당과 비슷한 수준에서 놀고 있었다.][* 이는 합당 직후 처음으로 치뤄진 선거인 1990년 4.3 재보궐선거에서 드러난다. 농촌 지역이라 여당의 세가 강했던 진천군·음성군에서 [[민주당(1990년)|꼬마민주당]] 지지를 선언한 [[허탁]]이 당선되고 여당의 텃밭인 대구 [[서구 갑(대구)|서구 갑]]에서도 [[민주자유당]] [[문희갑]] 후보가 겨우 과반을 넘겼으며 꼬마민주당 [[백승홍]] 후보가 40% 이상 득표했다. 다만 대구 서 갑은 [[정호용]]의 지지층들이 백승홍 후보 지지로 이탈한 것의 영향도 크다.] 마땅한 대권 후보도 없었고 김영삼이 다시 [[김대중]]과 합당이라도 해서 혹여나 정권 교체가 되면 양김에게 정치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민정계 측은 결국 김영삼에게 당권을 내주게 되었다. [[김영삼]]이 [[민주자유당]] 대표최고위원 재임 기간 도중 진행된 1992년 [[제14대 국회의원 선거]]에서 민주자유당은 149석으로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. 그러나 김영삼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자신을 흔드는 민정계에게 전가하며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여론을 반전했다. 이는 다른 지역 의석을 상당수 잃으면서도 과거 [[통일민주당]]의 기반이었던 부산/경남 지역은 거의 석권했기 때문에 가능했다. 이전까지 김영삼은 대통령 후보를 지명제로 하여 자신을 대표로 지명할 것을 [[노태우]] 대통령에게 요구해 왔으나 총선 패배를 기회로 이용해 여론을 자신에게 돌려 놓은 후 경선을 통한 대통령 후보 선출이라는 타협점을 마련했다. 그리하여 민정계인 [[이종찬(1936)|이종찬]]과[* 민정계 내에서는 [[박태준]], 이종찬, [[이한동]] 등이 경선 출마를 놓고 고심하다 결국 이종찬으로 낙착되었다.] 민주계인 [[김영삼]]은 대통령 후보 경선을 했고 김영삼은 압도적인 표차로 이종찬을 누르고 [[민주자유당|민자당]]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다. 이종찬이 경선에 임박해 불공정 경선을 명분으로 사퇴했으나 경선은 예정대로 진행됐고 김영삼은 약 67%의 득표율을 얻었다. 이에 평소 김영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[[박태준]], [[이종찬(1936)|이종찬]], [[김복동]], [[박철언]], [[이자헌]], [[유수호(정치인)|유수호]], [[장경우]] 등을 비롯한 일부 민정계 의원들은 탈당했으나 대부분의 민정계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당에 남았다. 이 탈당자들은 이후 [[현대그룹]] 명예 회장인 [[정주영]]이 창당한 [[통일국민당]]에 합류하거나 [[새한국당]]을 창당했다. 이때 [[부산]]의 시민사회 비YS세력도 통일국민당에 합류했으나 [[제14대 대통령 선거]]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.[* 이런 보수진영의 대선 직전 대분열은 이후에도 반복되어 [[제15대 대통령 선거]]에서는 [[이인제]]가 [[국민신당(대한민국)|국민신당]]을 창당했고 [[DJP연합]]까지 겹쳐 여야 정권교체에 일익을 담당했고 [[제17대 대통령 선거]]에는 [[이회창]]이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며 [[제19대 대통령 선거]]에서는 [[유승민]] 등 비박 진영이 [[새누리당]]을 탈당해 [[바른정당]]을 창당해 대선에 도전했다.] 한편 이러한 계파 간 갈등을 두고 일부에선 당시 [[문화방송]](MBC)에서 방영하던 일요 [[아침 드라마]] [[한지붕 세가족]]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.[* 훗날 시사 팟캐스트 방송 '[[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]]'에서 [[김영삼]]이 [[민주자유당]]의 실권을 잡아가는 과정을 다루었는데 민주당 중심의 입장이지만 참고할 만하다. [[https://youtu.be/01Fa3aiUItw?t=3675|1시간 1분 15초부터 시작]].] 3당 합당을 한 지 수십여년이 흐른 후에도 민주계·민정계·공화계 후신 간의 계파 싸움은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.[* 물론 단일하게 내려온 것은 아니고 이합집산+이들과 연관이 적은 당내 젊은 소장파 세력들도 등장하는 등 계파가 더 분화되긴 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